유엔헌장은 안전보장이사회 허가 없는 무력사용을 금지한다. 예외가 있다. 헌장 53조1항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적국에 대해서는 침략 재개 방지를 명분으로 무허가 군사행동을 인정하고 있다. 이른바 ‘적국 조항’이다. 적국명을 적시하지 않았으나 ‘헌장 서명국의 적국’이라는 표현이 있어 독일, 일본 등이 해당한다. 일반 회원국과 차별하는 적국 조항은 77, 107조에도 있다.
적국 조항 삭제는 일본 외교의 비원(悲願)이다. 적국 조항의 국제법적 근거는 유엔 가입과 함께 소멸했으며, 유엔 기여를 감안할 때도 맞지 않는다는 논리다. 1995년 이 조항이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인식한다는 유엔총회 결의가, 2005년엔 이 조항을 삭제하겠다는 유엔총회 결의가 채택됐다. 헌장 개정은 회원국 3분의 2와 안보리 상임이사국(미·중·영·프·러) 전체 동의가 필요한 탓에 실현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는 이 조항이 이미 사문화됐다고 보고 ‘구(舊: 옛) 적국 조항’이라고 부른다.
일본 정부 기대와 달리 적국 조항이 부활하는 조짐이다. 중·일, 러·일 갈등이 격화하면서다. 주일 중국대사관은 지난해 12월 적국 조항을 거론하며 “중국은 안보리 허가 없이 직접 군사행동을 취할 권리가 있다”고 무시무시한 주장을 했다. 러시아 정부도 남쿠릴열도(일본 호칭 ‘북방영토’)에 대한 실효 지배를 강화하면서 반발하는 일본에 “패전국임을 잊지 말라”고 뼈아픈 조롱을 한다. 급기야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 이번 유엔총회 연설에서 “일본의 명예가 걸린 문제”라며 조속한 삭제를 호소했다. 반면 중국 정부는 “여전히 중요한 현실적 의미가 있다”고 삭제 요구를 일축했다.
그런데 일본 입장에선 더욱 당혹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미·중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동맹국이었음을 상기시킨 것이다. 미·중의 적이었던 일본이 트럼프 의중이 무엇인지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2012년 제2차 아베 신조 정권 출범 이래 일본 외교의 전반적 기조가 된 대외 강경 노선이 종국에 득일지, 실일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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