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 거쳐 ‘상품’ 만든 제작·투자사
사회 분열 초래 책임 피할 수 없어
제작·투자시스템 원칙 바로 세워야
1974년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다룬 영화 ‘암살자(들)’의 역사 왜곡 논란이 뜨겁다. 영화는 북한과 연계된 재일교포 문세광의 단독 범행이라는 정설을 뒤집고, 중앙정보부, 나아가 박정희 대통령이 사건의 배후에 있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이 하나의 결론을 향해 대사와 소품, 자막과 당시 영상이 한목소리를 낸다. 1600만 관객을 동원한 ‘왕과 사는 남자’의 주연 유해진을 비롯해 이민호, 박해일 등 초호화 배우들이 총동원됐다.
정치권의 공방은 가열됐고, 보이콧이 확산했다. 출연 배우를 광고 모델로 기용한 기업들이 일차적 타깃이 됐다. 일부 보수단체는 유해진의 집 앞에서 집회를 벌였다. 유해진 측에서 신변 보호를 요청해 경찰이 조치에 나서기도 했다. 영화는 여전히 국내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지키며 손익 분기점을 돌파할 기세다.
여론은 차갑다. KNA25·한길리서치가 전국 성인 1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51.6%는 역사 왜곡, 37.7%는 창작의 자유라고 답했다. 놀라운 것은 20대의 60.4%, 30대의 69.8%가 역사 왜곡이라고 응답했다는 것이다. 40대(38.3%), 50대(41.5%)보다 최대 31.5%포인트 높았다.
정치인들의 우격다짐은 논외로 하자. 본질은 국민의 절반 이상이 영화에 반감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중 많은 이들이 SNS를 통해 배우와 광고주에게 책임을 묻고 있다. 책임 소재는 조금 더 고민해야 한다. 연기에 최선을 다했을 뿐인 배우에게는 조금 더 관대할 필요가 있다. 감독에게도 그렇게 하자. ‘속상하다’, ‘이렇게까지 폄훼될 줄 몰랐다’ 이런 자기변명만 늘어놓는 감독을 붙들고 대체 뭘 물을 수 있단 건가.
그럼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나. 당연히 제작자와 투자자다. 제작사인 하이브미디어코프, 투자 주체인 IBK기업은행, 산업은행에게 따져야 한다. 이들은 영화라는 ‘상품’을 만들고 투자하고 판매하는 기업들이다. 스타벅스가 ‘탱크데이’ 논란에 책임을 지고 후속 조치를 취했듯, 이들도 합당한 책임과 행동에 나서야 한다. 사회를 갈등과 분열로 몰아넣고, 유족에게 상처를 안긴 책임을 응당히 져야 한다.
세계지식재산기구(WIPO)는 실화에 기초한 영화에서 실제 인물이 저지르지 않은 범죄를 허구적으로 묘사할 경우, 관객이 사실과 허구를 혼동할 수 있음을 경고한다. 해당 인물의 명예를 훼손할 위험도 지적한다. 영국 BBC는 논쟁적이거나 민감한 사건을 다룰 경우, 부당하게 왜곡하거나 불공정하게 묘사하지 말아야 한다고 못 박는다. 또 관련 유족이 살아있는 경우 사전에 알려 협조를 구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우리도 기준이 없지 않다. MBC는 ‘허구를 전제한 방송이라도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의 행적을 근거 없이 폄훼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한다. 그렇다면 ‘암살자(들)’은 이런 국내외 기준을 통과할 수 있을까?
매우 힘들 것 같다. ‘암살자(들)’은 허구를 사실처럼 믿게 하는 수많은 영화적 장치를 갖고 있다. 많은 실존 인물이 실명으로 등장한다. 팩트와 픽션의 경계가 붕괴하면서, 관객들은 무엇이 사실이고 허구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고 박정희 대통령 유족의 고통을 헤아린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국책은행들의 무리한 투자는 책임경영 관점에서 지탄받을 일이다. 기업은행의 영화 투자 체크리스트에 이미 정치적·종교적·선정적 소재가 투자 부적합 요소로 포함돼 있다는 사실이 국감에서 드러났다. 그런데도 논란이 예견된 영화에 20억원을 직접 투자하고, 제작사에 펀드를 통해 142억원을 투자한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담당 직원 8명이 만장일치로 찬성했다는데, 오히려 심사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했는지 의심스럽다. 산업은행 역시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펀드 운용사가 투자했다고 항변하지만, 운용사의 위험관리 역량을 점검할 책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원칙이 지켜지고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했다면 ‘암살자(들)’은 적어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세상에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원칙과 시스템을 바로 세워야 한다. 또 다른 불행한 산고는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구정우 성균관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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