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5년 12월, 나폴레옹은 아우스터리츠에서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을 격파했다. 단 한 번의 전투로 제3차 대프랑스 동맹이 사실상 붕괴했다. 이듬해 예나와 아우어슈테트에서 프로이센군을 격파해 프로이센을 군사적 파국으로 몰아넣었다. 나폴레옹에게 전투는 적 주력을 격멸해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핵심 전략적 수단이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18세기 유럽에서는 결정적 전투를 추구하기 쉽지 않았다. 당시 국가의 재정과 병력 동원 능력에는 한계가 있었고, 상비군은 막대한 비용과 시간을 들여 육성한 국왕의 귀중한 자산이었다. 한 번의 전투에서 주력을 잃으면 쉽게 복구할 수 없었기에 결전은 위험한 도박이었다. 따라서 지휘관들은 무리한 결전보다 군대를 보존하면서 기동, 요새 점령, 보급로 차단 등으로 적을 압박해 유리한 강화 조건을 확보하려 했다. 이러한 제약을 완화한 것은 프랑스혁명이었다. 1793년 국민총동원령 이후 프랑스는 전례 없는 규모의 병력을 동원하고 손실을 보충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막대한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전투를 거듭 벌일 수 있게 된 것이다.
나폴레옹은 여기에 군단 체제를 도입하고 발전시켰다. 보병·기병·포병을 하나로 묶은 군단은 독자적으로 기동하고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작은 군대였다. 그는 여러 군단을 각기 다른 경로로 신속하게 기동시킨 뒤 결정적인 시간과 장소에 집중시켰다. 이른바 분진합격이었다. 울름 전역에서 여러 군단의 기동으로 오스트리아군을 포위해 대규모 전투 없이 항복시킨 것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나폴레옹 특유의 용병술이 더해졌다. 아우스터리츠에서 결전을 서두르던 그는 의도적으로 우익을 약하게 배치해 연합군의 공격을 유도했다. 강행군 끝에 도착한 다부 군단의 증원 병력이 우익을 지탱하는 사이 술트 군단이 연합군 중앙을 돌파했다. 이어 술트 군단이 방향을 돌려 다부 군단과 함께 연합군 좌익을 협공해 격파했다.
대규모 국민동원이라는 구조적 변화, 군단 체제라는 조직적 혁신, 그리고 나폴레옹의 탁월한 용병술. 이 세 가지가 맞물리며 나폴레옹은 결정적 전투를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핵심 전략 수단으로 끌어올렸다. 나폴레옹 전쟁을 경험한 클라우제비츠가 ‘전쟁론’에서 전략을 “전쟁의 목적을 위한 전투의 사용”으로 정의한 것도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 후반으로 갈수록 결정적 전투 전략은 한계를 드러냈다. 프로이센을 비롯한 연합국도 징병과 대규모 동원을 확대해 병력 손실을 보충할 능력을 키웠고, 군단 체제까지 받아들이면서 프랑스의 군사적 우위를 좁혀 갔다. 스페인에서는 정규군을 격파해도 민중의 저항이 이어졌고, 1812년 러시아는 보로디노에서 패하고 모스크바를 내주고도 굴복하지 않았다. 1813년 연합군은 나폴레옹 본대와의 결전을 피하면서 다른 프랑스군을 각개격파했다. 결국 나폴레옹은 1814년 퇴위했고, 이듬해 재기했으나 워털루에서 패배하며 몰락했다.
심호섭 육군사관학교 교수·군사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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