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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은 떠나고 비정규직 삶의 흔적만 남았다

입력 : 2018-12-20 19:20:06 수정 : 2018-12-20 19: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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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톡톡] 故 김용균씨 유품에 얽힌 이야기 / "새벽근무 위해 오후 7시반 잠들자, 알람은 두 개 이상"
충남 한국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비정규직 운전원으로 일하다 숨진 김용균(24)씨가 남긴 유품에는 그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청년 비정규직 고 김용균 시민대책위’와 유족들은 지난 16일 충남 태안의 김씨 기숙사를 방문해 남아있는 유품사진을 18일 언론에 공개했다. 기숙사 벽에 붙은 A4 크기의 종이, 수험서 그가 작업장에 남긴 컵라면, 손전등 등에는 비정규직 노동자로 치열하게 살던 흔적이 녹아있었다.
◆ 하루 12시간 근무…A4용지에 담긴 김용균 삶의 흔적

기숙사 벽에 붙은 종이에는 김씨가 적은 “취침시간(데이 전) 19시 30분”이라는 문구와 함께 별표가 여러 차례 그려 있었다. 오후 7시 30분에 잠을 자야 데이(새벽) 근무에 늦지 않게 출근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의 발전소 근무는 4조 2교대로 돌아갔다. 하루 12시간 일하고 하루 쉬는 일상이 반복됐다. 다만 다음날 야간(나이트) 근무가 잡히면 그 전날 업무에 들어가 하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김씨의 동료 A씨는 지난 17일 세계일보와 만나 “아무리 쉬운 일이라도 밤에 근무하는 것과 날을 샌다는 건 힘들다”며 “특히 하루도 못 쉴 때면 씻고 바로 나가야 한다. (삶의) 리듬이 다 깨진다”고 털어놨다.
고 김용균씨의 충남 기숙사 벽에 붙어있던 A4용지. 취침시간, 준비물 등이 적혀있다.
벽에 붙은 종이에는 “데이 전날 머리, 몸을 씻자”, “알람은 두 개 이상 맞추어 베개 옆에 두자”, “베개 위나 바로 바짝 옆에 두지 말자”, “스위치가 귀 방향으로 향하는지 확인”이라고도 적혀있었다. 늦지 않기 위해 의지를 다진 것이다. 사고가 발생한 11일에도 김씨는 야간 근무를 맡아 오후 6시 20분쯤 회사로 출근했다.

◆ 김씨 유품 ‘컵라면’에 얽힌 사연들

사고 현장에서 발견된 김씨의 유품에는 ‘컵라면’이 있었다. 2년 전 구의역 사고에서 발견된 김모군의 유품과 같았다. 기숙사 벽에 붙인 종이에도 ‘준비물’이라며 지갑, 이어폰, 폰, 부식(나이트 야식, 데이 도시락)을 나열했다. 즉 발전소에서 발견된 컵라면은 그의 ‘나이트 야식’이었다.

동료들의 증언에 따르면 오전 근무 때 근무자들은 부서 별로 점심을 인근 식당으로부터 배달시켜 사내 대기실에서 먹었다. 반면 야간 근무를 할 땐 배달가능한 일정 인원이 안 돼 식당들이 주문을 받지 않았다. 김씨와 동료들은 즉석 밥이나 컵라면, 빵 등으로 끼니를 때우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회사는 야식은커녕 야식비도 제공하지 않았다. 김씨의 아버지는 “아들이 평소에 인근 중형마트에서 햇반이나 컵라면 등을 구매했다”고 말했다.
고 김용균씨 충남 기숙사에 있던 수험서들.
◆ 쌓여있는 수험서적들 “발전기술서 원청간 직원은 단 1명…정규직을 위해선 신입뿐”

방 한쪽엔 수험 서적이 한가득 쌓여있었다. ‘한국남동발전 인적성 검사’, ‘GSAT(삼성 인적성 검사)’, ‘소방설비 산업기사 필기 전기편 단기완성’ 등 대부분 신입공채를 위한 수험서였다. ‘비정규직’이었던 김씨는 ‘정규직’을 위해 열심히 공부했다. 김씨는 군 제대 후 7개월간 구직활동을 했지만 빈번히 낙방했고, 지난 9월 하청업체인 한국기술발전에 1년 계약직으로 입사했다. 어머니는 “(아들이) 한전을 생각하고 경력을 쌓으려고 들어갔다”며 일이 힘들어도 참았다고 했다. 고된 업무 와중에도 김씨는 한국전력공사 정규직이라는 꿈을 위해서 틈틈이 공부했다고 한다.
취업한 김씨가 신규직을 위해 열심히 공부했던 이유. 동료들에 따르면 협력업체에서 원청으로 가는 ‘정규직 전환’은 쉽지 않았다. 김씨의 한 동료는 세계일보와 만나 “직원 중 딱 한명이 남동발전에 제일 하위직인 별정직으로 들어간 적이 있다”며 “발전기술에 있을 때보다 봉급이 더 많았지만 원청의 1년 된 직원보다 (처우가) 못했다”고 말했다. 실제 김씨의 연봉은 2700만원 수준으로 알려졌다. 이는 원청인 한국서부발전 평균 연봉의 3분의 1수준으로 같은 업장에서 상태적 박탈감을 느낄 정도였다.

직장 선배들은 김씨를 ‘성실한 청년’이었다고 기억했다. 한 직원은 “발전소는 힘들고 위험해서 이직률이 높은데 착한 젊은이들만 남는다”고 했다. 하청업체의 연령 구조를 보면 고령으로 이직이 힘든 사람들, 퇴직한 사람들, 20~30대 젊은이들로 구성돼 있었다.
◆ 현장에서 발견된 고장난 손전등

발전소에선 김씨가 사용했던 고장난 손전등도 발견됐다. 건전지 10여개와 함께. 김씨에게 손전등은 어두운 작업공간을 비춰주는 유일한 ‘빛’이었다. 김씨의 동료들의 증언에 따르면 김씨는 사고를 당하기 며칠 전 상사에게 손전등 하나를 빌렸다고 한다. 자신의 손전등에 이상이 생겼기 때문이다. 김씨의 한 동료는 17일 세계일보와 만나 “(상사에게) 손전등을 빌렸는데 또 고장이나 미안한 마음에 (용균이가) 아무말 못했던 것 같다”며 “결국 휴대폰 플래시로 비춰보기 위해 가까이 가다 사고를 당한 것 같다”고 했다. 검은 탄가루가 날리는 상황에서 웬만한 불빛은 밝은 점에 불과하다는 게 동료들의 설명이다.

실제 김씨의 사고 현장에는 플래시가 켜진 휴대폰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김씨의 다른 동료는 “원청에 지급되는 손전등과 하청업체에 지급되는 손전등은 품질이 다르다”며 “하청업체에 지급되는 손전등은 불빛이 강하지 않고 고장도 잘 난다”고 말했다.

지난 16일 고 김용균씨의 충남 기숙사를 방문한 유가족. 어머니 김미숙씨는 그의 신발을 안고 오열했다.
◆ 김씨 어머니 “위험한 곳에서 우리 용균이 동료들이 일하고 있다”

16일 김씨의 기숙사에 방문한 유가족은 김씨의 흔적들을 보고 눈물을 쏟아냈다고 한다. 어머니는 김씨의 신발을 끌어안고 30분간 오열했고 아버지역시 인근 마트의 직원이 아들을 기억하자 울음을 터뜨렸다.
지난 16일 고 김용균씨 아버지 김해기씨가 용균씨가 이용하던 마트를 들러 오열하고 있다.
이틀 뒤인 19일 어머니 김미숙씨는 서울 중구 포스트타워에서 열린 사회적 참사 특조위의 안전사회 토론회에 참석해 “오늘도 아연실색할 만큼 위험한 곳에서 우리 (김)용균이 동료들이 일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씨는 이어 “지금도 현장에서 일하는 용균이의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 (김씨가 작업한 9~10호기 외) 나머지 1∼8호기도 멈춰야 한다”고 눈물을 훔쳤다.

안승진 기자 prodo@segye.com
사진=고 김용균 시민대책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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