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주지 넘어 다양한 의미 담겨
때론 친구의 집도 포근함 가득
내 마음이 머무는 곳이면 족해
마흔한 살에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죽었으나 무연고자로 취급되어 사흘간 시체 안치실에 방치되었다가 화장된 화가가 누구일까?
우리는 제주 서귀포에 있는 이중섭 미술관에 갔다. 하지만 미술관은 현재 시설 확충 공사 중이어서 근처 창작스튜디오에서 이중섭 아카이브 전시만 봤다. 화가의 창작물보다 기록, 사진, 책 컬렉션 중심으로 관람하다 보니 아무래도 그의 생애사를 유심히 살펴보게 되었다. 이중섭의 삶이 순탄치 않았던 건 익히 알고 있었으나 그의 죽음은 새삼 참혹하게 다가왔다. 이중섭이 제주도에 살았던 기간이 채 일 년도 되지 않는다는 점도 놀라웠다. 1950년 한국전쟁이 나자, 이중섭은 그해 12월 원산에서 피난길에 올랐다. 그는 이듬해인 1951년 1월부터 12월까지 서귀포에서 생활하며 ‘섶섬이 보이는 풍경’ ‘서귀포의 환상’ 등을 그렸다. 이웃이 빌려준 작은 초가집에서 네 가족이 단란한 한때를 보냈다고 한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서귀포의 환상’을 마주하면 누구라도 저절로 미소가 지어질 것이다. 캔버스를 채우고 있는 구김살 없이 장난스러운 몸짓을 한 어린아이들과 커다란 새, 먹음직스러운 복숭아. 해맑은 웃음소리와 복사꽃 향기가 뿜어져 나오는 그림이다. 이 그림을 그렸던 당시, 그러니까 제주도에서의 몇 달이 이중섭에게는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미술평론가들은 입을 모은다. 이후에 그는 부산, 일본, 통영, 진주, 서울 등지를 떠돌아다니며 작품 활동도 하지만 1956년 9월에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생을 마감했다.
예술가에게 집은 어떤 곳일까? 모든 사람에게는 집이 필요할 것이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라는 이란 영화를 보면 지진으로 집 잃은 사람들의 처참한 삶도 드러나지만, 무엇보다 친구의 집을 찾아가는 소년의 순수한 얼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아마드라는 아이가 친구 네마자데의 공책을 들고 언덕길을 오르고 ‘바지’라는 작은 단서 하나에 두근두근 남의 집 문을 기웃거리다가 달음박질치고 어두워가는 골목길을 헤매며 울상이 되어가는데, 어쩌면 예술가의 집은 저렇게 길 위에 있는 건 아닌가 싶어지는 것이다. 작가란 친구나 타인의 처지를 걱정하며 무작정 그의 집을 찾아 헤매고 울부짖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의 아이들처럼 내게도 성장기를 같이 보낸 절친이 있다. 어린 시절 나는 친구의 집에서 숙제하고 밥도 얻어먹고 잠을 자기도 했다. 그 친구가 지금은 제주도 서귀포에서 ‘한달살이’ 중이다. 이 기회를 놓칠세라 대충 가방 싸서 친구한테 왔다. 우리는 둘이서 둘레길도 걷고 포구도 가고 영실코스로 한라산에도 갔다. 똑같이 누룩 빛깔의 치마도 샀다. 오늘은 아르누보 뮤지엄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친구가 탄식하듯이 감탄사를 연발했다. 눈앞으로 펼쳐진 짙푸른 바다와 섭지코지 언덕에서 군무를 추는 억새라니! “주여, 가을이 왔습니다. 여름이 참으로 길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놓아주시고, 들에는 많은 바람을 풀어주세요. 라이너 마리아 릴케 시 맞지?” 친구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친구는 시를 많이 읽지만, 아직 시를 쓰지는 않는다. 모르지, 밤에 남몰래 쓰는지. 우리가 릴케의 ‘가을날’을 애송하던 시절에 나는 그 시의 마지막 연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후에도 오래 고독하게 살면서/ 잠자지 않고,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날릴 때, 불안스레/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나는 의아했다. 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을까?” 무슨 연유로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후에도 오래 고독하게 살아야 할까?” 릴케가 집 없는 사람과 고독한 독자에게 악담이나 저주를 퍼붓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알 것 같다. 내 집은 없어도 친구의 집이 있으니까. 나는 언어의 집을 짓는 사람이니까. 고독이라는 실존의 전제조건 속에서 불안스레 이리저리 헤매는 게 나의 운명이겠다.
김이듬 시인·서울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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