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 97세를 일기로 별세한 정기승 전 대법관은 노태우정부 시절인 1988년 6월 현직 대법관 신분으로 대법원장 후보자에 지명됐다. 당시는 13대 총선으로 탄생한 여소야대 정국이었다. 여당 민정당은 125석에 그쳐 전체 299석의 절반에 훨씬 못 미쳤다. 반면 야당인 김대중(DJ) 총재의 평민당, 김영삼(YS) 총재의 민주당, 김종필(JP) 총재의 공화당 의석을 더하면 국회 운영을 주도할 수 있었다. 대법원장 임명동의안 표결이 정국 앞날을 판가름할 분수령으로 떠올랐다.
오늘날의 서울중앙지법은 1960∼1980년대만 해도 민사지법과 형사지법으로 나뉘어 있었다. 시국 사건이 몰려드는 형사지법과 그 소속 법관은 정권의 주목 대상이었다. DJ와 YS는 정 후보자가 전두환정부 시절인 1984년 형사지법원장을 지낸 점을 들어 ‘반대’ 당론을 정했다. 그러자 민정당은 보수 색채가 짙은 공화당에 매달렸다. JP가 노태우 대통령의 육사 선배라는 인연이 작용했는지 둘은 제법 잘 통했다. 민정·공화 두 당 의석을 더하면 아슬아슬하지만, 원내 과반이 가능했다.
1988년 7월2일 오후 2시 국회 본회의장에서 표결이 시작됐다. 평민·민주 두 당 의원들은 대부분 기권하거나 반대표를 던졌다. 총 295표 중 찬성은 141표에 그쳤다. 과반(148표 이상)에 7표 모자라 부결됐다. 임명에 찬성하는 초선 의원 일부가 기표 과정에서 실수해 무효가 14표나 나온 것이다. 정 후보자는 고개를 숙이고 현직 대법관에서도 물러났다. 헌정사 최초의 대법원장 인준 부결은 여소야대 국회의 위력을 제대로 보여줬다.
당시 언론 보도를 보면 평소 우유부단해 보이는 모습 때문에 ‘물태우’로 불린 노 대통령이 그때만큼은 정말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던 노 대통령은 국정 주도권을 잡기 위한 특단의 대책 마련에 나섰다. 1년 반쯤 지난 1990년 1월 노 대통령, YS, JP가 청와대에 모여 전격으로 발표한 민정·민주·공화 ‘3당 합당’이 그 결과물이다. 이는 우리 정치의 뿌리 깊은 양당제 전통이 되살아나는 계기로 작용했다. 대법원장 인준 부결이 한국 현대사에 한 획을 그은 정계 개편으로 이어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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