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검색

[안보윤의어느날] 친절을 원해

관련이슈 안보윤의 어느 날 , 오피니언 최신

입력 :

인쇄 메일 url 공유 - +

구글 선호 매체 등록

평일 오전, 전철역이 종점인 마을버스 안은 사람들로 빼곡했다. 학교나 회사에 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종점까지 이동했고,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은 재래시장이나 각종 병원이 몰려 있는 사거리에서 주로 내렸다. 그래서인지 앞쪽 좌석에는 어르신들이,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는 뒷좌석에는 학생들이 자리 잡는 익숙한 구도가 만들어지곤 했다.

백발의 노인이 버스에 올랐을 때 버스 안은 포화 상태였다. 왜소한 체구의 노인은 황금색 배지가 여러 개 달린 야구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그 아래로 숱이 적은 머리칼이 빗질한 모양 그대로 뻗어 있었다. 노인이 몇 걸음을 채 옮기기도 전에 앞쪽에 앉아 있던 또 다른 노인이 벌떡 일어섰다. “나 금방 내려요, 여기 앉으쇼”. 노인은 숫제 잡아끌듯 백발의 노인을 자리에 앉혔다.

“일찍부터 어딜 가요? 나는 내과 가는 길이오.” “나는 치과. 다정한 치과.” 백발노인이 턱 아래쪽을 툭툭 쳐 보이며 답했다. 노인이 의아하다는 듯 “그거는 이 버스가 아닐 텐데?” 하고 묻자 백발노인은 어디 좀 들렀다 가려고 그러지, 했다. 몇 살이오? 일흔넷. 나는 일흔이오. 노인들은 두런두런 대화를 이어갔다. 금세 내린다던 말과 달리 노인은 영 내릴 기색이 없었다. 그는 백발노인 옆에 손잡이를 바짝 쥐고 서서 말을 이어갔다. “근데 치과는 거기보다 바른이 잘해. 바른 치과.” 노인이 위치를 설명하자 백발노인이 어디쯤인지 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거기는 뭘 잘하나? 이빨 심는 거?” 질문에 뒤따른 건 의외의 대답이었다. “설명. 바른은 설명을 잘해요.”

내릴 때가 됐는지 노인이 뒷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며 말했다. “우리 같은 노인네들한테 화도 안 내고, 알아먹을 때까지 설명해 주거든. 친절해요.” 노인은 자리에서 불쑥 일어났던 때처럼 불쑥 버스에서 내렸다. 반듯하고 야무진 걸음걸이였다. 나는 보도블록 위를 걸어가는 노인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노인이 했던 말과 꼭 같은 말을 이미 들은 기억이 있어서였다.

아버지가 혈압 문제로 오년 가까이 다니던 병원이 있었다. 그런데 건강검진을 꼼꼼히 하고 보니 그간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의 용량이 아버지 병세와 달랐다. 이리저리 알아보니 오진이 잦다는 말을 여러 번 들은 병원이었다. 다른 곳으로 옮기자는 말에 아버지는 이상할 정도로 고집을 부렸다. “그 병원이 대체 왜 좋다는 거야?” 재차 묻자 아버지가 마지못해 답했다. “거기 의사는 짜증을 안 내.” 아버지는 1949년생으로, 의사들이 하는 어려운 말이나 작고 빠른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해 되묻는 경우가 잦다고 했다. “무슨 뜻이냐고 자꾸 물어보면 의사들이 짜증을 낸단 말이야. 근데 거기는 안 그래. 다들 친절해.” 좋지 않은 소문과 달리 그 병원은 어르신들로 늘 북적였다.

친절을 바라는 마음이 다른 가치를 상회하고 있다면 뭔가 잘못된 것 아닐까. 노인들이 환대받는 곳이 갈수록 줄어들고, 어려운 말과 쓰기 힘든 기계들이 날로 늘어나는 시대라는 걸 익히 알고 있음에도 마음이 씁쓸했다. 친절을 원해. 그것은 머지않은 미래에 내가 하게 될 대사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안보윤 소설가


오피니언

포토

56세 김혜수, 완벽한 올백 머리
  • 56세 김혜수, 완벽한 올백 머리
  • 이주빈, 꽃다발 들고 청순 미모
  • 조여정 '올블랙 패션'
  • 카리나, 패딩 패션으로 드러낸 핫한 몸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