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분 먼저 가겠다고 끼어들어봐야 결국 목적지엔 비슷하게 도착합니다. 조금만 마음의 여유를 가지면 서로 얼굴 붉힐 필요도 없고, 싸울 일은 더더욱 없어요.”
최근 다녀온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부산시 일행을 태운 버스를 운전하던 여성 기사가 들려 준 말이다. 기자는 지난달 초 ‘2025 밀라노 디자인위크’를 현지취재했다. 부산시 참관단 일행이 20명을 넘다 보니 현지 여행사를 통해 행사기간 전세버스를 빌려 이동했다.

밀라노 인구는 137만명으로 부산 인구(340만명)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교통여건은 비슷하다. 중세시대 형성된 밀라노는 부산처럼 좁은 골목길로 이어져 있었다. 특히 로마제국 문화재들이 매장된 탓에 지하 개발이 엄격히 제한되는 바람에 좁은 도로엔 노면전차(트램)와 굴절버스가 여객수송의 핵심을 맡고, 자동차는 대형차보다 소형차가 더 많았다. 특히 밀라노 시내 주요 간선도로에는 약 1㎞마다 회전교차로가 있고, 도로 가장자리는 항상 주차 차량들이 점령하고 있었다는 점이 특이했다. 유럽 도시 특유의 좁은 도로 때문에 출퇴근 시간대 도심은 물론 외곽 고속도로까지 정체를 빚기 일쑤였다.
부산의 교통상황은 더하면 더하지 덜하진 않다. 산이 도시를 둘러싸고 앞은 바다인 ‘배산임수’ 지형인 부산은 도심 자체가 좁아 도로여건이 매우 열악하다. 도로는 항상 막히고, 지역 특유의 급한 성격까지 더해지다 보니 ‘부산에서 일주일만 운전하면 전국 어디서나 운전할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생겼다. 그만큼 부산 사람들이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복잡한 도로 사정에도 짜증 내는 밀라노 시민은 거의 없었다. 도로가 좁고 교통정체까지 더해진다면 운전자 태반이 목울대까지 치밀어오르는 욕지거리를 느낀다. 하지만 밀라노 사람들은 ‘양보운전’이 체화한 듯싶었다. 물론 모든 밀라노 시민의 준법정신이 투철한 것은 아닐 것이다. 횡단보도 등 보행신호를 지키는 것은 한국인들이 더 나아 보였다. 밀라노의 보행자 신호등은 차량과 마찬가지인 초록, 노랑, 빨강 3색이다. 밀라노 보행자들은 노란불은 물론 빨간불에도 아무렇지 않게 도로를 건넜다. 차량은 달랐다. 신호와 상관없이 도로가에 보행자가 있으면 무조건 정차했다.
밀라노 교통문화를 접하면서 ‘선진국민과 후진국의 기준은 무엇일까’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교통문화만 갖고 선진국, 후진국을 구별하지는 않는다. 한국은 세계 10대 경제강국이다. 지난해 우리나라 국민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3만6024달러임에도 서민들 삶은 여전히 팍팍하다. 세계인들을 열광시킨다는 K팝 등 한국 문화는 어떤가.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직후 일었던 이념 논쟁을 생각하면 부끄럽기만 하다.
비상계엄과 조기 대선, 경기침체와 통상 전쟁, 탄핵 찬반 집회 등으로 정치와 경제, 사회 등 나라 안팎이 위기 상황이다. 선진국 문턱을 넘은 지 십수년인 줄 았았는데 아직까지 쌍팔년도에 머물고 있었구나라는 자괴감마저 들기도 하는 요즘이다.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 결정문에서, 밀라노 출장길 시민에게서, 반드시 투표하겠다는 20대 아들에게서 ‘동 트기 전 가장 어둡다’는 격언을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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